Date |
2012/04/06 19:25:55 |
Name |
PoeticWolf |
Subject |
바람부는 날 |
+ 경어체가 아닌 점 용서하소서...
봄바람이란 이름이 주는 느낌이 무색하다. 어제는 볕이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더니 오늘은 창문이 들썩거리고 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엔 피가 굳는다. 내 안에 담긴, 갖기 싫은 바람색 유전자를 미리미리 진정시켜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평생 그 핏속에 가득한 바람의 기운을 가두지 못하셨다. 평생 일 때문에 집을 늘 비우셨던 할아버지로부터 그 핏속의 바람은 슬금슬금 불어왔던 것이라, 도대체 두 분은 한 자리에 있지를 못하셨다. 진득하게 일을 하지도 못하셨고, 집에 안 들어오시는 날이 늘어났다. 기분이 좋으시면 거리에서 춤을 추고 다니셨고, 언짢으시면 집안 화분들이 깨졌다. 종교에 몸을 담으시면서 아버지의 바람은 멎은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 또 다시 휘리릭 떠나셨었다. 신앙도, 심지어 가족도 움킬 수 없었던 그 바람을 하긴 아버지 혼자 어찌 잡았으랴 싶다.
바람만 잔뜩 일으키고 이리 저리 휘몰아치기만 하는 아버지는 그러나 나이에 덜미를 잡히셨다. 그리고 어느 작은 옥탑방에서 웅웅거리며 바람의 시늉만 내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버지는 특식이라며 샌드위치를 만드셨다. 식빵 두쪽을 구워 한쪽은 딸기쨈을 바르시고 다른 한쪽엔 땅콩쨈을 바르셨다. 브루스타를 켜고 달걀을 깨셨다. 어디서 보셨는지 프라이가 따끈따끈할 때 치즈 한 장의 마무리가 자랑스러우신 듯 했다. 그날, 삼십년을 다 채워서야 드디어 잡은 바람의 맛은 너무 뻑뻑해 목이 다 메였다.
평생이 바람이라 남은 건 먼지뿐인 아버지는 상견례 자리에도 나오질 않았다. 또 무슨 바람이신지 결혼식장에도 확실히 나오시겠다는 말씀이 없으셨다. 장모님은 상처를 받으셨다. 그리고 홀로 나온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대신 식장엔 꼭 나오실거라고, 아들조차도 불안한 약속을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다행히 결혼식 당일에는 가장 일찍 식장에 나오셨다. 그 두껍고 투박했던 샌드위치를 만든 사람답지않게 아버지가 빌려 입고 오신 양복은 얇고 남루했다. 솔직히 아버지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싶었다. 옷차림보다 아버지 안에 지금 어떤 바람이 불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춤이라도 추시는 건 아닐까. 술이라도 과하게 하지 않으실까. 그러나 생전 처음 사돈집 식구들과 인사를 하실 땐, 놀랍게도 보통의 아버지가 되셨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시고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하시고 어머니와 같이 서서 굳은 표정이라도 사진 찍히실 땐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고마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피하고 계셨다. 폐백실에서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나보다 막 며느리가된 녀석을 더 쳐다보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선은 그렇게 또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가 조용히 계신 덕에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신혼여행을 바로 떠나야했으므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식장을 나섰다. 난 아버지의 돌발행동이 염려돼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서둘렀다. 그때 큰고모가 뒤로 와서 내 손에 봉지를 쥐어주셨다. 여자 바지 하나와 삼십만원이었다.
"니 마누라 편하게 입으라고 하나 만들어왔다. 그라고 이건 느그 아빠가 주라카드라. 줄 게 이거밖에 없다고 니한테 챙피해서 몬주겠다드라."
슬쩍 아버지쪽을 쳐다봤지만, 아버지는 아예 멀찍이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양복의 남루함이 잘 어울리는 등이었다. 나도 등을 돌리고 차에 올랐다. 그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릴 자신이 없었다.
식장을 떠나 한창 운전을 하고 달리는데, 사촌형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한 잔 하고 있다며, 잘 갔다오라고 했다. 술기운에 용기가 난 것일까, 아버지가 전화기 저편에서 바꿔달라고 했다. 그날 처음 아버지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아빠. 갔다올게."
"...미안하다."
"왜 그래 또."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
마침 발음이 심하게 꼬여서 난 못들은 척했다.
"갔다올게. 술 적당히 하고."
전화를 끊고 고속도로에서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그래서 바람이 오늘처럼 방 창문을 흔들면, 그날 고속도로에서 들었던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내 안에 아직도 부는 바람섞인 아버지의 피를 소름처럼 느낀다. 다만 그건 어디로 사라지고 싶은 성질의 것이 아니라, 더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은 바람이다. 어린 자식들과 살 부대끼기 좋아하시던 내 나이대의 젊은 아빠가 다시 보고 싶은 바람이다. 창문 덜컹이는 바람 소리를 더 못 참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가 휘파람을 뚜뚜 불기 시작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19 08:51)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