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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1/10/11 19:04:16 |
Name |
헥스밤 |
Subject |
꿈은 조금 멀어지고 죽음은 조금 가까워진. |
아아, 먹고 살기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회사나 대학원은 개똥밭만도 못한갑다. 하루에 자소서 스무장 씩 쓰고 있는 후레한 자취방도 마찬가진가. 야 어제까진 니방에서 총각냄새 났었는데 오늘부턴 니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난다. 학원 강사 하던 시절에 이런 드립을 친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얘들아. 대학 갈라고 글쓰기 배운다 생각하지 마. 대학 졸업하고 취직 준비하려면 자소서 죽어라 써야지 취직 하고 나면 기획안 죽어라 써야지 대학원이라도 가면 논문 죽어라 써야지 그러다 니들 나중에 뒤질 때 유서도 써야 될 꺼 아냐. 죽기 전까지 평생 뭔가 쓰다 죽어야 되니까 지금 열심히 배워두거라. 그야말로 개드립이었는데, 틀린 건 없는갑네.
아저씨들 넋두리를 듣다 보면 예전엔 모두 좋았다던데. 왜 우리는 좋은 적이 없었을까. 대학 원서 쓰던 시절 우리 세대 자소서는 모두 한결같았지. IMF로 실직하신 엄격하신 울아부지 경제 위기로 부업을 시작하신 자상하신 울어무니 아래 1남1녀 장남으로 태어났답니다. 대학에 오니 오 필승 코레아 어딘가 들떠 있었지만 뭘 했는 지는 모르겠어. 히딩크는 4강 신화를 이루었고 시위대는 광화문을 점령하고 미대사관 앞 까지 진격했는데 바뀐 건 없는 것 같더라. 축구는 여전히 못하고 미군은 여전히 사고치고 내 삶은 여전히 후레하고. 모처럼 육군 상병 만기제대한 서민 출신 소부르조아가 대통령이 되어 기분이 좀 좋았던 것 같기도 한데, 그만 죽어버렸어 씹할. 제대를 하고 나니 군대에 싸지방이 생기더만. 싸지방이 뭘 싸는 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군인이었을 때 없었다는 게 억울한 건 사실이지만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아. 물론 가끔 군대 꿈을 꾸곤 하지. 너처럼 말야.
낭만. 그런 말 별로 안 좋아해. 그래도 대학 시절은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해. 어느 노래에서처럼, '낮술을 마시고 수업은 다 띵기고 세미나시간에는 철학을 존나 연구하고 동아리방에서는 드럼을 존나 연습하고' 그랬었지. 어느 겨울 국회앞 시위를 취재하던 학교 신문 기자 친구는 쪼금 더 좋은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급수탑에 올라갔다가 동상으로 얼어죽을 뻔했지. 그 친구는 지금 필리핀의 따듯한 바닷물 속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어. 돈 많이 벌어 따듯한 동남아로 휴가를 나간 건 아니고, 인생 살아보니 별 거 없다며 이제 스쿠버 다이버로 먹고 살꺼야 하고 동남아로 떠나버렸지. 소설 같은 이야기겠지만 정말이야. 편집실에 죽치던 녀석들은 그렇게 안팔리는 좌빨 찌라시의 기자가 되고 동남아의 스쿠버 다이버가 되고 가난한 바텐더가 되었지. 종이 뭉치 책 뭉치 담배 냄새가 쩔었던 그놈의 편집실에 스쳤던 녀석들은 팔리는 신문사의 기자가 되고 이름 아는 회사의 회사원이 되는 동안 말야. 존중을 취향하니까 별 문제는 없어.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던 여자 동기 녀석은 결혼을 하더니 술을 끊었다더군. 남편이 자기 술먹는 거 안좋아한데. 별 문제는 없어. 단과대 학생 회장까지 했던 어떤 형은 지금 잘나가는 논술학원 원장이라더라. 뭐 별 문제는 없어. 그래도 그인간들, 대학 시절엔 치열했거든. 적어도 뭐 나보다는 그랬으니까. 그냥 살기가 뭐같은거지. 응. 뭐. 그거. 남근.
살기가 남근같다 성기같다 하는 넋두리들을 듣다가 어떤 게이 친구놈이 한마디 하더군. <남근도 안받아본 놈들이 인생을 알아?> 푸핫. 그래 님 잘났음. 그 놈보다 얼추 두어 배 나이 드신 어떤 게이 형은 여기에 한마디 붙이더라. 니들이 젖빨고 있을때부터 난 <검열삭제>빨았어 인마. 푸하하. 그래요. 어차피 사는 건 다 힘든거니까.
그래도 죽는 거 보단 낫잖아요. 나이를 먹고 보니 사람들이 너무 죽어. 고등 학교 때 좋아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죽어버렸어. 학회 일로 부산에 내려가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고 아 내일 발표 어쩌나 하고 친구랑 방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옆방에 있던 지도교수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오더라. 야. 노무현 죽었데. 뭐. 결국 그래서 그날은 하루종일 머리가 멍하고, 뭘 발표했는지도 모르겠네. 새벽까지 술을 쳐마셔서 그런건지 그가 죽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동기 누군가는 그가 죽어 제일 슬픈 건 386들이겠지만, 두번째로 슬픈 건 우리가 아닐까 하고 말했었지. 어쨌거나 우리는 그와 함께 청춘을 살았으니까. 물론 난 왼쪽에서 그를 깠고 다른 이들은 오른쪽에서 그를 깠지만 죽은 건 슬픈 일이야. 최진실도 죽었지. 사실 어렸을 때 티비를 잘 안 봐서 최진실 전성기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근데 그냥 사람이 죽었다니까 슬프더라구. 참 많이들 갔어. 앙드레김도 갔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았던가, 아직 젊은 사람이라 먼 나중에나 죽겠구나 했는데, 그게 또 아니더라구(인생이 그런거지 뭐). 요정은 간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이 요절해버렸어. 아 젠장 쓰다 보니 또 눈물이 나는구만. 유명한 사람들에게만 죽음이 찾아오는 건 또 아니야. 친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는 누나가 죽어버렸어. 상 중에 호상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오래 건강하게 잘 사시다 편히 돌아가신 친구 할아버지는 호상이었지. 짧은 삶 아프게 살다 훌쩍 여행을 떠나더니 훌쩍 자살해버린 아는 누나 쪽보다는 호상이잖아. 팔아야 할 술을 손님이 없어 혼자 막 쳐먹던 중에 아는 형이 울먹이며 찾아와서 이야기하더라. 그날 뭘 했는지도 모르겠네. 술을 쳐마셔서 그런건지, 누나가 죽어서 그런건지. 내 주위 사람들만 죽는 것도 아니더라구. 친구의 친구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
그래. 술을 줄여야지. 술이 다 문제야. 하면서도 그게 또 그리 쉽지는 않아. 술마시고 죄를 지으면 형량이 줄어듭니다. 술마신 상태로 범죄를 당하면 항거불능 상태가 참작되어 가해자의 형량이 늘어납니다. 이건 뭐 그냥 대놓고 법원에서 술을 먹으라고 권고하는데, 민주 시민인 내가 어찌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어. 게다가 최근에는 폭탄주 좀 마시고 TV정책토론회도 나오고 막 그러잖아. 이거 정부가 이렇게 술집을 지원해주니 술집 좀 하다보면 내년에는 재벌이 될 거 같은 기분인데. 물론 오늘은 당장 손님이 없지만 나아지겠지. 술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재벌이 되서 일단 학자금 대출좀 갚고 가게 빚고 갚고 가계 빚도 갚고 그다음에 마당이 딸린 넓은 집을 사고 넓은 집에 연못도 파고 연못 위로는 작은 다리도 놓고 연못에는 비단잉어도 좀 기르고 연못 주변에는 수석도 몇 개 가져다놓고. 옛날에 젊었을 때 우리의 꿈은 모두 달랐던 것 같은데. 조국통일 노동해방 같은 거창한 것도 있고 좋은 노래 좋은 그림 좋은 영화를 만들자 했던 녀석도 있었고 착한 언론인 성실한 공무원 좋은 아빠 같은 조국통일 노동해방보다 조금 더 난이도 있는 꿈에 도전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뭐 요즘엔 나도 너도 우리도 다 똑같잖아. 일단 학자금좀 갚고 마당이 딸린 넓은 집을 사고 이하 생략. 그렇게 꿈은 조금씩 멀어졌고 죽음은 조금씩 가까워지지. 서른 즈음이니까.
그래서 서른 즈음에를 못 들어. 누구 말마따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스물 즈음에 미리 서른 즈음의 감정을 느끼며 듣는 노래지, 진짜 서른 즈음이 되면 못 듣는 노래인 것 같아. 외려 요즘에는 이장혁의 <스무 살>을 자주 듣지. 이건 서른 즈음에 스무 살 즈음의 감정을 되새갬질하며 듣는 노래인 것 같아.
그런 서른 즈음. 꿈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는 결혼이 있는 것 같아. 결혼이 꿈과 죽음 중 어디에 더 가까운 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정신 빼고 있으면 청첩장이 싸늘하게 날아와 꽂히더라구. 뭐. 결혼 적령기 비슷한 시기니까. 결혼은 좋은 일인가. 대체로 한번은 하고 가끔 두번도 하고 세번도 하니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아쉬운 건 결혼한 녀석들은 이제 없는 녀석이 된다는 거지. 내가 결혼을 안 해서 그런가. 누군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이후로 그를 볼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이 결혼할 때 뿐인 것 같아. 그렇게 언젠가는 철모르는 녀석들만 남게 되려나. 그 때엔 내가 수장이 되어주겠어. 하지만 무언가 가끔, 연애하지 않는 시기의 금요일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인가. 평소엔 괜찮은데, 금요일만 되면 아는 넘이나 뇬이나 다들 연애질을 하고 있고,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어 쓸쓸해지는 그런 거 있잖아. 에에, 뭐 집이 모텔촌 근처가 아닌 게 어디야. 한 친구가 찾아와 자기가 예전에 사귀었던 애가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해서,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을 틀었던 적이 있어. 아, 물론 멱살을 잡힌 정도로 끝났지. 생각해보니 박정권 적시타로 기아에 승리한 날, 불꽃투혼SK와 불같은 패기와 기운쎈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박정권!을 틀었다가 기아팬한테 멱살을 잡힌 적이 있는데. 푸후.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고 무슨 글을 더 쓸 수 있겠어. 살아보니 말도 글도 어렵더라. 어렸을 때는 막 말하고 막 휘갈기고 패기 쩔었는데. 나이 먹으니 한마디 한마디 쉽지가 않아. 서른을 넘어서도 무언가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직업이 된다면야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 때까진 아마 조용하고 평범한 바텐더일테니. 하지만 인생이 뭐 생각대로 T도 아니고 생각처럼 그렇게 되나. 살다 보면 또 술도 먹고 글도 쓰고 연애도 하고 야구도 보고 음악도 듣고 그러겠지. 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뭐 별 수 있나. 살아야지. 이악물고 사는 건 못하겠고, 그래도 살아 살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렇게 두껍이는 굽이 돌아 제 갈 길을 간다네. 꿈이 좀 더 멀어져서 언젠가는 안 보여도, 죽음이 더 가까워서 눈앞을 휙휙 스쳐가도 어쨌거나 인생. 살자. 살아보자고.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2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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